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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손담비의 남자 이규혁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프로필, 집안, 나이, 학력정보)

by 하위하위 2022.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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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손담비씨가 이규혁씨와 결혼을 발표했는데요.

 

이상화씨와 강남씨 커플도 그렇고 연예인과 운동선수 커플이 많이 보이네요.

 

저번에는 손담비씨에 대해 알아보았으니 오늘은 이규혁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 프로필

출생: 1978년 3월 16일

 

학력: 리라초등학교 (졸업)
신사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학 / 학사)

 

종목: 스피드 스케이팅

 

주종목: 500m, 1,000m

 

2. 어린시절

피겨 스케이팅 코치인 어머니 이인숙 씨의 뱃 속에서부터 얼음판을 지친 진짜 '모태 스케이터'. 4살부터 취미 수준으로 얼음을 타다가 초등학교 4학년 시절그냥 교내 롤러스케이트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자타공인 '빙상 신동'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2살 터울 동생 이규현도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였으나 형에게 밀려 어머니처럼 피겨 스케이팅을 하게 되었다.

3. 1990년대

중학생 때인 1992년에 처음으로 국가대표로서 주니어 대회에 출전했고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도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1996-97 시즌부터 시니어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1997년 12월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1,000m에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하였다. 그리하여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대한민국 빙속 역사상 최초로 금메달리스트로 기대를 모았으나, 큰 부담을 받았는지 성적은 500m 8위, 1,000m 13위에 그쳤다.

 

4. 2000년대

2000-01 시즌에는 월드컵에서 한 차례 우승하고 세계선수권에서도 메달은 따지 못했으나 상위권의 성적을 내는 등 전성기를 이어갔다. 이런 성적을 바탕으로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유력한 메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나가노 때와 마찬가지로 성적은 500m 5위, 1,000m·1,500m 8위로 노메달. 이후 2005년까지 깊은 슬럼프를 겪게 된다. 이 시기에 낸 가장 좋은 성적은 2003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2관왕이 된 것이다.



2005-06 시즌부터 부활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다시 도전하였으나 1,000m에서 3위와 0.05초 차이로 4위를 차지한다. 당시 이강석이 500m에서 동메달을 땄기 때문에 이 일은 사람들에게 별로 부각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이규혁은 이후 올림픽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이 기록이 이규혁의 올림픽 도전사에서 최고의 기록이 되었다.



절치부심한 이규혁은 2007년부터 선수 생활의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스프린트 세계선수권에서 2007-2008, 2010-2011 각각 2연패를 하며 통산 4회 우승의 금자탑을 달성한다. 스피드 스케이팅의 레전드 선수들인 에릭 하이든, 제러미 워더스푼, 이고리 젤레좁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록이며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다.

 

5. 2010년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때의 그는 32세로 은퇴를 고려하고 있을 때라 올림픽을 앞둔 인터뷰 등에서 마지막으로 참가하는 올림픽일 거라고 말했다. 세계랭킹도 높았던 만큼 유력한 우승 후보였지만 이규혁은 500m 15위, 1,000m 9위를 기록하며 후배 모태범이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옆에서 응원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력한 우승 후보였고 당시 모태범과 이상화가 인터뷰에서 훈련 당시 그가 전수해준 노하우 등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에게 주목을 받았고 그에 대한 게 알려지면서 '무관의 챔피언'이라 불렸다.



사실 30대 이상의 소규모 종목 현역 선수들의 경우는 후배들의 지도까지 담당하는 코치 겸 선수가 많다. 이규혁이 그런 케이스인데 현재 남녀 스피드 스케이팅 메달리스트들은 이런 식으로 지도받은 적이 많았다. 다만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 자신의 후배들이 승승장구할 때 축하해주면서도 정작 본인은 메달이 없어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며 주변에서 아무리 위로를 해줘도 마음이 우울했었다고 고백했다. 이때 했던 인터뷰가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계속 도전한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 때 성적이 좋아서인지 그는 예정을 바꿔 은퇴 시기를 뒤로 미뤘고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도 도전을 하게 된다. 올림픽 6회 연속 출전이며 하계와 동계를 통틀어 대한민국 스포츠 선수 중 최다 출전 기록이다. 사실 이미 예전보다 세계 랭킹이 많이 떨어져서 메달권과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팬들은 그에게 마지막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500m 18위, 1000m 21위의 성적으로 그의 6번째 올림픽 도전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주요 국제대회 우승을 죄다 경험하고 올림픽 메달만 없던 관계로 김동문 & 라경민과 더불어 동하계 불운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

 

6. 은퇴이후

2016년 스포츠토토 빙상단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한국동계영재스포츠 센터의 전무이사직을 맡았었고, 최서원 씨의 조카 장시호 씨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불명예스럽게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빙상계에서 장기간 활동하지 않았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 경조사 가끔 다니던 게 전부였을 정도다. 오히려 다른 분야인 요식업 쪽으로 진출해서 쇠고기 요리점인 '규가든'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2021년 9월 28일, KH 그룹 산하 IHQ 스피드 스케이팅 팀의 감독으로 전속 계약을 체결하여 오랜만에 빙상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리고 오는 5월 13일 손담비씨와 결혼한다고 합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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