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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시대의 지성'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 별세...그는 누구인가?

by 하위하위 2022.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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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필

출생: 1933년 12월 29일,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읍 좌부리 (現 충청남도 아산시 좌부동)

 

사망: 2022년 2월 26일 (향년 88세)

 

재임기간: 제29대 문화부 장관(1990년 1월 3일 ~ 1991년 12월 19일)

 

2. 어린시절

호적상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실은 1933년생이다. 호적에 34년생으로 올라오게 된 것은 연말에 태어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두 살을 한꺼번에 먹어야 한다는 걸 안타까워하신 아버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집안 형편은 부잣집도 가난한 집도 아닌 중간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래도 그 시절에 아버지가 사업을 하실 정도였다고 하니, 나름 비교적 잘 사는 축에 드는 집이었던 듯 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업이 실패하든 말든 마음이 끌리기만 하면 무슨 아이템이건 간에 시작하고 보는 성격이셨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실패한 상품들이 재고가 남으면 전부 자기에게로 와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이어령은 이후 이런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어머니는 아주 감성적인 분이셔서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셨고, 거기다가 형들도 모두 예술 하는 사람들이어서 자연스럽게 그쪽 분야에도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또래 아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에 진학할 때쯤에 6.25 전쟁이 나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크게 어려워지자 형님 한 분이 "서울대 의대나 법대를 가면 등록금을 대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사실 본인은 국문과를 가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의예과도 문리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가족 몰래 국문과에 원서를 내고는 그냥 문리대라고 얼버무리고 말았고, 그 이후 실제로 서울대 국문과에 합격한다. 하지만 집안 사람들은 전부 의예과에 간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잔치 분위기에 젖어 있었던 상태였는데, 나중에 사실대로 국문과라고 말하자 집안 어른들은 "아니 언문 배우러 대학 가는 놈도 다 있냐!"며 낙담하셨다고 한다.

3. 1990년대, 초대 문화부 장관

1980년대에 이어령은 두 번의 장관 제의를 받았다. 첫 번째 제의는 문화공보부 장관 자리였는데, 문화라면 몰라도 공보행정에 관해선 아는 게 없어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문화부와 공보처가 분리되면서 신설된 문화부의 초대 장관 자리를 다시 제의받자 이를 수락했으며, 1990년 1월 3일부터 1991년 12월 19일까지 역임하였다.

 

이어령이 장관 재임 때 한 일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외국어인 '로드 숄더'를 '갓길'로 바꾼 일이다. 애초에 '갓길'이라는 말이 이어령이 창시한 단어다. 원래는 노견(路肩, 직역하면 길어깨)이라는 심히 어려운 한자어를 고친 것이다. 이 외에도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 발족,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경복궁 복원 계획 수립 등이 그의 재임 중에 실시되었다.



조정래의 <황홀한 글감옥>에서 밝히기를 1989년 10월에 소설 태백산맥을 탈고한 뒤 아리랑을 집필하기 위해 1990년 당시 중국으로 취재를 떠날 때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내사 문제로 안기부에서 막아 출국에 문제를 겪을 때 이어령이 먼저 조정래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부른 뒤 "중국에 가려고 하느냐"고 물었고, "새 작품 써야 하니까요"라는 대답에 "그래, 가야지."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인터폰으로 "조 선생님 빨리 수속해드려요."라고 지시했고, 문화부장관이던 이어령의 장관 보증으로 중국으로 취재여행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또 1992년 검찰이 태백산맥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내사를 진행하면서 소관부서인 문화부에 의견서를 요청했을 때도, 이어령은 평론가 김상일에게 "태백산맥은 이적 표현의 위험이 있는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해 씌어진 <신판 홍길동전>이다"라고 쓰라고 방향을 정해주었고, 이 의견서에 따라 당시 대검찰청에서는 내사를 마치고 "소설 태백산맥에는 분명 문제가 있지만 이미 350만 부 넘게 팔린 책을 법으로 문제 삼는 것은 과히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기로 한다."고 발표하고 사건화를 유보했다. 이에 대해 이어령은 조정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조정래 본인은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고 10여 년 뒤에야 당시 의견서를 썼던 김상일에게 전해듣고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공적도 있는 만큼 과오도 있었는데, 윤범모 예술의전당 초대 미술부장이 막 신설된 미술관에 '젊은 시각-내일의 제안전'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었으나, 그는 초도순시 때부터 "미술관에 민중미술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해왔다. 이에 문화부와 예술의전당 임원들은 해당 전시회 폐쇄, 작품 철거시도, 도록 배포금지 조처 등을 내리자 윤 부장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윤범모는 12월 부장직을 사퇴했다.

 

더 많은 내용이 있으나 핵심 내용만 적었습니다.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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